Elephant in the company
“회사의 어려움은 직원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그러니 휴가 가고, 취미 생활하고,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시라”
좋은 사장님이시다.
사장 신년사로 단 5분 만에 끝난 23년 시무식은 그의 옳은 말로 수놓아졌다. 맞는 말이었다. 직원들은 최선을 다했다. 업무량 증대에 과로로 쓰러지고, 인력 부족에 연차도 소진하지 못해 휴가를 내고 책상을 지켰다. 우리보다 큰 적자 폭의 지역사들도 받는 연차수당을 반납하면서까지 그렇게 분골쇄신하면 일할 맛 나는 직장, 비전 있는 회사를 만들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열사 중 가장 열악한 수준의 임금피크제, 퇴직금제, 안식년제를 감내하는데 더해 작년 연차수당까지 반납했지 않은가. 하지만 돌아온 건
“조합 요구대로 연차 소진 기간을 1월까지 한 달 연장해 줄 테니, 23년도 연차수당 반납하기로 합의하자“였다. 연차촉진제의 원만한 시행을 위한 노조의 요구안에 보인 반응은 적반하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짧디 짧은 신년사의 요지가 사장인 나도 잘했고 여러분도 잘했으니 누구 탓도 하지 말라니, 오직 광고공사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다들 휴가 가고(올해도 연차촉진제 시행하겠단 복선인가?) 취미 생활하고 가족과 행복하라니…
직원들의 희생과 기대를 저버리고 적자라는 성적표를 손에 쥐었으면 최소한의 사과와 자기 반성이 우선 아닌가? 뻔뻔한 선장의 모습을 신년 첫 업무개시일부터 목도했다.
우선, 작년 초 흑자 전환 운운하며 핑크빛 청사진을 내밀 때 조합은 분명히 경고했다.
현재 인력과 업무 구조상 연차촉진제 시행은 불가능하다고. 연차 보상은 보상대로 못 받고 휴가는 휴가대로 못 쓰는 사태가 명약관화하다고. 그때 사장과 보직자들은 문제없다고 호언장담했다. 결과적으로 휴가는 휴가대로 못 쓰고 경영수지는 수지대로 적자가 났다.
책임지고 사과해야 한다.
서울은 수백억 흑자, 지역은 고사 직전이다. 이는 본사와 지역사간 비합리적이고 불균형적 광고료 재분배율에도 기인한다. 이 지경에 사장은 무얼 하고 있는가? 대표이사직을 걸고서라도 본사와 싸워 왜곡된 비율을 바로 잡는 전면전에 나서야 한다. 그런 결기라도 보이라고 그 자리에 앉혀두는 게 아닌가. 행여나 미운털 박혀 잘릴 게 두려운가? 두려워 마라. 어차피 얼마 안 남았다. 잘려도 잔여 보수와 퇴직금은 덤으로 챙겨가지 않는가.
적자 책임은 명백히 사장에게 있다.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광고 공사에 의해 적자가 날 수밖에 없다고? 백번 양보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보려 해도 이를 어쩌나… 그건 다시 말해, 연간 3억 정도의 인건비와 비용을 쓰고 있는 사장은 있으나 마나임을 자인한 셈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신성장 동력과 미래 먹거리를 찾아 각고의 노력을 해도 그 돈값을 다 못 할 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손쉬운 길을 택하는 무책임함이 용인될 순 없다. 제작비 줄이고 경비 감축하고 직원 복지 축소하는 마른 수건 쥐어짜기에 보는 이들의 손이 다 얼얼하다.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자기 손엔 아무것도 묻히지 않으려는 행태에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사장은 21년 3월 취임사에서 ”고정관념에 갇혀 민첩하고 유연한 조직문화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22년 1월 신년사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흐름과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단합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조합은 건강한 조직문화 조성과 계약직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이미 본사와 여러 지역사가 시행 중인 ‘무기계약직의 일반직 전환 제도 마련’을 사측에 요구했다. 쟁점은 2가지였다. 조합도 동의한 일반직 전환 후의 업무 확장이 첫 번째. 두 번째는 전환함에 있어서 임금 인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해서 다른 기시행사들의 경우처럼 현재의 계약직 임금 총액에 가장 가까운 일반직 호봉을 부여하는 방식에 노사가 합의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공들여 공식적인 노사협 자리에서 제도 마련을 위한 큰 틀에 합의한 지 불과 달포가 지나 말을 뒤집었다. 자기가 말한 임금 인상 우려는 전환 후 대상자가 퇴직 때까지 받을 모든 총액에 있어서 기존 계약직을 유지했을 때와 비교해 상승효과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란다. 즉, 그러려면 전환 시 상당한 임금 삭감을 업고 현저히 낮은 호봉을 부여받으면 가능하다는 말씀. 당장 엄청난 감액을 감내해도 퇴직 때 되면 계약직이었을 때나 일반직이었을 때나 총액은 같으니 괜찮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업무는 기존 계약직의 범주를 벗어나 일반직처럼 확장해서 더 해야 한다는 해괴망측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배임의 우려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기시행 중인 본사와 타 계열사 사장들은 왜 배임으로 처벌받지 않았는가? 그리도 법을 무서워하는 분이 수 차례 조합 요구를 묵살한 채, 작년 8월부터 현행법을 위반하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 직원 휴게실 설치 의무를 명시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지금이라도 고발하면 처벌 대상이 된다.
핑계 중에 겨우 고른 게 배임이라니…
본인은 기자 시절 호봉 승호에 따른 임금 상승을 혜택을 다 누리지 않았던가?
이게 그리도 강변했던 ‘유연한 조직문화’이자‘구성원의 단합’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안동MBC 구성원뿐만 아니라, 22년 11월 7일 대회의실에 앉아있었던 보직 간부들 모두를 우롱하고 농락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Elephant in the room]
: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하기 꺼리는 문제, 금기시되는 주제
유재용 사장 저서 <우리는 왜 세습에 열중하는가?>에서도 이 말이 아주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우리나라 경제의 문제점과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서 사람이 사는 방 안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인 코끼리를 구성원들이 묵인하지 말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방점을 찍고 있다. 문제가 뭔지 알고 있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비겁함이 집단 전체의 발전을 저해하는 고질병이라는 말이다.
우리 회사 3층에는 코끼리가 살고 있다. 책임지지 않으려는 경영책임자. 아이러니하지만 그가 우리 회사 3층에 앉아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하기 꺼리는 문제이자 주제가 그 안에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코끼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다.
그와 가장 가까이 있는 건 보직 간부들일 것이다. 부디 코끼리 뒤에 숨지 말길 바란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2023년 1월 3일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본부 안동지부